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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유래
현재 우리나라 이(李)씨의 본관은 237본이라고 한다. 이씨는 대체로 한국계와 중국계 그리고 기타로 나뉜다. 한국계는 신라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다. 6성이란 《삼국사기(三國史記) 1권》『신라본기(新羅本紀)』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년) 6촌을 개정하여 사성(賜姓)한 성씨들을 말한다. 양산촌장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 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 대구촌장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진지촌장 지백호(智白虎)에게는 정씨(鄭氏), 가리촌장 기타(祈陀)에게는 배씨(裵氏) 그리고 고야촌장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를 하사하였다. 중국계로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고성이씨(固城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등과 같이 시조가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기타계로는 안남국(베트남)에서 망명해온 화산이씨(花山李氏),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

전주이씨는 현재 인구가 240만명에 이르는데 한국계인 이알평의 후손이라는 설과 중국에서 귀화한 설로 나누어져 있다. 중국에서 귀화한 설의 근거로 작자와 연대미상인 《완산실록(完山實錄)》에 의하면, 『전주이씨 시조 한(翰)의 자는 견성(甄城)으로 본디 중국에서 살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였다. 그때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난다는 동요가 유행했는데 배씨 성을 가진 자가 이를 모함하였다. 이에 한이 바다를 건너 신라에 오니 당시 나이 18세였다.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니 신라 문성왕이 불러 사공(司空)벼슬에 임명하였다. 1년 남짓에 국정을 공평하게 다스리니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리고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여 자연(自延)을 낳았고 자연은 천상(天祥)을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가지 한국계라는 설의 근거로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 의하면, 『이알평의 34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翰)이 완산이씨(完山李氏: 완산은 지금의 전주)의 시조가 되었다.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합천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 이상으로 볼 때 전주이씨가 중국에서 왔는지 또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는지 애매모호하여 단언할 수 없지만, 중국에서 왔다는 설은 아마도 당시의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것 같다.

풍패지관(豊沛之館) 전주현재의 전라북도 도청소재지인 전주(全州)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이었다. 백제가 신라에 망한 뒤에도 완산주(完山州)였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전주(全州)로 개칭하였다. 그 후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936년)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쳐서 평정한 후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일컬었다가 태조 23년(940년)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조선 태조원년(1392년) 이성계가 등극하자 자신의 조상이 난 고장이라 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격을 올렸다. 태종 3년(1403년)에 다시 전주로 개칭하고 부윤(府尹)을 두었다. 세조때에는 진(鎭)을 두기도 하였으며 그 뒤로 줄곧 전라도 감영이 이곳에 소재하였다.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는 풍패지관으로도 불린다. 전주객사 본관에는 명나라의 대문장가 주지번(朱之蕃)이 유려한 초서체로 쓴 '풍패지관(豊沛之館)' 현판이 걸려있다. 주지번은 중국 남월(南越)출신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온 차에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 송영구의 익산 집을 찾았다. 그가 전주객사에 머물면서 쓴 글씨가 현재의 현판이다. 풍패란 한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고향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본향이란 뜻이다.

전주이씨 시조
우리 전주이씨의 시조의 휘는 한(翰)이며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으며 배위(配位)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이다. 연대 작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에 의하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이시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러운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들어 오니 그 때가 18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쳐 알려졌다. 우리나라로 오신 지 얼마되지 않아 명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司空)벼슬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모든 벼슬아치들이 화합하고 온 백성들이 모두 즐겼다.』 전주(全州) 덕진구에 묘역(墓域)이 있어 '국경(國慶)의 시초'란 뜻으로 조경단(肇慶壇)(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이라 이름하며 매년 4월 10일 제사를 봉행하고 있다.

중조 안천대군
중조(中祖) 안천대군(安川大君)의 휘는 어선(於仙)으로 全州 滋滿洞(校洞)에서 父王 목조대왕(穆祖大王)과 母后 孝恭王后 平昌 李씨 사이에서 6남 중 長男으로 태어나 1274년 서거하였다. 穆祖大王은 호방한 기질로 20여세까지 전주 자만동에서 살다가 당시 高麗 무신정권의 득세와 전주 산성별감(현 知事)의 횡포를 피해 1230년 170가구의 혈족과 외족을 이끌고 어머니의 고향인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이주하였고 大君도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1235년 몽고의 3차 침입과 전주의 산성별감이 강원도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하게 되자 닥쳐올 화를 피하기 위해 또다시 목조는 동북지방 宜州 湧珠里(德原)로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목조는 의주(宜州), 인덕(仁德), 화민(和民)의 知事가 되었고 大君은 문과에 급제하여 낭서(郞署)벼슬에 오르면서 통정대부(通政大夫) 광록사(光祿寺) 소경(小卿)을 거쳐 품계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목조의 묘는 慶興 城南에 모셔졌다가 1410년(太宗 10년) 咸興 加平으로 다시 모시면서 능호를 德陵이라 명명했고 효공왕후는 安陵에 안장되었다. 이후 大君은 朝鮮 태조조(太祖朝) 때 左贊成 府院君에 추증됐고 1872년(高宗 9년)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봉되었다. 大君의 묘는 慶興 龍堂 赤島에 모셔졌으나 실전되자 咸興 천서 감저동 大君의 7대손 通政大夫 德龍묘 옆에 廟閣碑를 세우고 제향을 지내왔으나,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越南한 후손들은 현지 참배를 할 수 없어 1999년부터 大君과 배위 金海 金씨에 대한 추계 제향을 별도로 봉행하고 있다.